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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의식의 심리학]

어린 시절은 왜 길게 느껴졌을까?: 기억과 시간의 상관관계

서론

"어릴 때는 하루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을까?"
누구나 한 번쯤 품었던 이 질문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 지각과 기억 형성 방식의 핵심을 건드리는 인지적 의문이다. 어린 시절의 시간은 끝없이 늘어졌고, 방학은 계절보다 더 길게 느껴졌으며, 수업 시간은 시곗바늘이 멈춘 듯 천천히 흘렀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우리는 종종 "벌써 연말이야?",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라고 느끼며 매일을 쫓기듯 살아간다. 물리적인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지만, 체감되는 시간의 길이는 왜 이렇게 달라지는 것일까? 이 질문의 해답은 기억과 시간의 상호작용에 있다.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기억이 만들어내는 리듬이며, 인간의 뇌는 외부 자극과 감정, 사건의 양에 따라 시간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글에서는 특히 어린 시절에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던 현상을 기억의 형성 방식, 뇌의 발달 단계, 감각 수용 구조, 감정 반응의 차이 등 다양한 심리적·신경학적 요소를 통해 분석하고, 시간이 ‘짧아지는’ 것이 아닌 ‘덜 기억되는’ 과정이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은 왜 길게 느껴졌을까?

 

Ⅰ. 뇌는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기억의 밀도와 시간의 길이

인간의 뇌는 시간 자체를 저장하지 않는다. 시간은 물리적 사건의 흐름이고, 뇌는 그것을 사건 단위의 기억(fragmented episodic memory)으로 해석해 기록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동안 발생한 일들을 기억한다. 따라서 기억의 밀도가 높을수록, 우리는 그 시간을 ‘길었다’고 인식하고, 반대로 기억이 거의 남지 않은 하루는 ‘순식간’이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볼 때, 어린 시절의 하루가 길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뇌가 하루 동안 접하는 사건과 정보, 감정 반응, 감각 자극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그것을 세분화하여 저장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처음 만나는 사물, 장소, 규칙, 관계, 음식, 언어 등은 뇌에 강한 각인을 남기며, 이는 뇌가 기억해야 할 사건의 양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이러한 기억의 밀도(density of encoded events)가 높을수록 우리는 그 시간을 더 길게 느낀다. 어린 시절의 하루가 길었던 건, 단지 시간이 느리게 흐른 것이 아니라, 그 하루에 담긴 기억의 단위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Ⅱ. 감각의 개입: 뇌가 처음 접하는 세상은 느리게 흘러간다

어린 시절의 시간 체감은 감각의 활성화 정도와 밀접하다. 유아기와 아동기의 뇌는 감각 수용 범위가 매우 넓고 민감하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다섯 감각이 모두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고, 이 자극은 뇌의 다양한 부위에서 처리되며, 그것은 곧 ‘사건’으로 기억된다. 반면 성인이 되면 같은 환경, 같은 사람, 같은 루틴이 반복되면서 감각 입력은 점차 줄어들고, 뇌는 더 이상 반복된 자극을 ‘이전과 다른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되지 않는다. 예컨대 어린이는 같은 공원을 가도, 새로운 색의 꽃, 다른 모양의 미끄럼틀, 낯선 목소리 하나까지 모두 감각적으로 반응하며 사건 화한다. 성인은 같은 장소에 가도 대부분의 정보를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스킵하고, 새로운 기억으로 저장하지 않는다. 감각 자극이 기억의 전제 조건이라면, 어린 시절은 뇌가 감각을 통해 하루를 ‘쪼개어 저장’하던 시기였고, 성인이 된 지금은 ‘묶어서 처리’하는 구조로 바뀌었기 때문에 시간의 체감 길이가 달라진 것이다. 이처럼 감각 자극의 풍부함은 기억을 촘촘히 만들어주고, 촘촘한 기억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Ⅲ. 뇌 발달과 시간 처리 속도: 어린이 뇌는 ‘즉시성’으로 작동한다

어린이 뇌는 성인의 뇌와 다르다. 발달 중인 전두엽, 아직 미완의 시냅스 네트워크, 경험 기반 사고 대신 감각 기반 반응에 의존하는 구조는 뇌가 순차적 시간 처리보다는 즉각적인 반응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러한 뇌의 특성은 정보 하나하나를 독립된 사건으로 처리하게 하고, 시간의 흐름보다는 사건의 개별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성인의 뇌는 일련의 사건을 연결하고 압축하는 반면, 어린이는 모든 사건을 ‘처음’처럼 인식하며, 각 사건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 이것은 기억의 구조 자체가 다층적이고 세분화된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성인은 "학교에 갔다"는 하루를 하나의 덩어리로 기억하지만, 어린이는 교실에 들어간 순간, 친구와의 짧은 대화, 칠판 글씨 색깔, 교사의 말투 등 수십 개의 하위 사건으로 나누어 기억한다. 이처럼 하루를 얼마나 세밀하게 쪼개어 인식하고 기억하느냐는 시간 체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어린이 뇌는 바로 그 ‘쪼개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Ⅳ. 시간 체계에 대한 이해 부족이 체감 시간에 영향을 미친다

어린이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계량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체험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시계의 숫자 개념이나 "5분 뒤에"라는 말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지속을 의미하는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시간은 특정한 숫자나 구조가 아닌, 기다림, 감정, 사건으로 인식되며, 이는 시간 자체를 ‘길게 체험’하게 만든다. 예컨대 어린이가 엄마를 기다리는 10분은 단순히 ‘10분’이 아니라, 엄마가 안 오는 불안, 주변 자극의 과도한 인지, 멈춰있는 행동의 연속으로 구성된 감정적 체험이다. 반면 성인은 동일한 10분을 스마트폰, 음악, 내부 사고를 통해 압축적으로 흘려보내며, 시간의 흐름을 숫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짧게 느낀다. 이처럼 시간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시간의 주관적 길이는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어린 시절의 하루가 왜 느리게 흘렀는지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요소다. 시간은 개념이 아니라 감각이었고, 숫자가 아닌 감정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되었고, 더 길게 체감되었던 것이다.

 

Ⅴ. 기억에 남는 하루 vs 사라지는 하루: 지금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 시간이 빨라졌다고 느끼는 근본 원인은 시간이 짧아진 것이 아니라,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뇌는 새로운 정보를 중심으로 기억을 저장하며, 반복되고 특별하지 않은 하루는 대체로 ‘요약 처리’된다. 반대로, 새로운 장소, 처음 만난 사람, 낯선 경험이 포함된 하루는 시간 단위로 또렷하게 남는다. 이는 우리가 여행 중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도 시간 체감을 되돌릴 수 있을까? 답은 ‘가능하다’이다. 일상을 의식적으로 변형시키고, 새로운 경험을 일상 속에 주입하며, 매일의 기억을 회고하는 루틴(예: 저널링, 사진 기록, 산책 루트 바꾸기 등)을 적용한다면 뇌는 다시 ‘시간을 촘촘히 기록하는 모드’로 전환할 수 있다. 즉, 기억을 남기는 기술을 연습하면 시간은 다시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시간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환경과 뇌 구조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도록 설계돼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 효과는 훈련과 의도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어린 시절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던 이유는 단순히 "어릴 때는 그랬지"라는 감상이 아니라, 기억과 감각, 뇌 발달, 인지 구조의 총합적 작용이다. 뇌는 시간을 직접 저장하지 않지만, 시간 속에서 발생한 사건을 감각적으로 저장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관적 시간을 구성한다. 어린이는 사건을 세분화하고, 감각에 민감하며, 즉각적이고 다층적으로 기억을 남기는 방식으로 하루를 인식한다. 반면 성인의 뇌는 효율을 중시하며 반복을 압축하고, 예상 가능한 일상을 요약 처리함으로써 하루를 ‘짧게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이 감각은 되돌릴 수 있다. 의식적인 루틴, 새로운 자극, 감정의 주의 깊은 관찰, 기억의 정리 습관을 통해 우리는 다시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감각으로 이어진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뇌가 어떻게 그것을 느끼고 기록하느냐에 따라 그 속도와 밀도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 조절권은 여전히 우리의 선택 안에 있다.